정부의 단일표준 방식을 발표한 김창곤 기술심의관(정통부차관. 한국정보사회진흥원장 역임. 현 LG유플러스고문)의 증언.
“1년간의 미국 콜럼비대학연수를 마치고 95년 8월 하순에 귀국해 두번 째로 기술심의관으로 일하게 됐어요. 국내에서 CDMA와 TDMA를 놓고 단일표준과 복수표준을 놓고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여기에 이미 CDMA방식을 조건으로 제2이동통신사업자 허가를 받은 신세기통신까지 접속방식 논쟁에 가세했어요. 사태를 더 악화시켰어요”
잠시 그 무렵, 국내 사정을 알아보자.
당시 PCS방식을 놓고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 등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그룹은 각기 다른 기술방식의 사업을 추진했다. 아이러니 한 점은 한국이동통신이 CDMA방식을 주장한 반면 국가 중추 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은 TDMA방식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이 기술방식을 놓고 갈리자 장비업체와 단말기 제조업체 등까지 이 논란에 가세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현대전자, 맥슨 등은 CDMA방식을 주장했고 대우통신 한화전자정보통신 등은 TDMA방식을 선호했다.
한국통신은 “CDMA보다 TDMA방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한국이동통신은 “국책과제로 선정돼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들인 CDMA기술을 국가표준으로 삼는 게 당연하다”고 맞섰다.
그 당시에 CDMA방식을 단일표준으로 결정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상용화 한 일이 없어 일부에서는 시스템의 안정성이나 경제성 등에 우려를 제기했다.
한국통신측은 “TDMA는 이미 검증된 기술로 보편적 서비스를 실현할 수 있고 해외시장 진출도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동통신측은 “TDMA를 도입하면 국내 통신시장을 외국업체에 내줄 수 있다”며 “CDMA를 하루 빨리 상용화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칼라힐수가 정부에 신세기통신의 아날로그방식을 허용해 줄 것을 한국측에 요구했다. 그는 당시 미국 에어터치사 법률고문을 맡고 있었다. 미 에어터치사는 신세기통신의 외국인 최대주주로 주식 11.4%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청와대와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을 오가며 압력을 넣었다. 신세기통신의 말바꾸기에 정보통신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신세기통신은 사업권을 신청할 당시 “국내 개발 CDMA로 서비스를 시작하겠다”는 조건을 달아 계획서를 제출했다. 정부는 이런 조건을 허가기준으로 삼아 신세기통신에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허가했다. 그런 신세기통신이 CDMA가 아닌 아날로그로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겟다니 정보통신부의 속이 편할리 없었다.
김 기술심의관의 회고.
“신세기통신측의 주장은 ‘CDMA상용화가 1년6개월 후에나 가능한데 그렇다면 대안으로 아날로그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것이 핵심이었니다. 신세기통신의 미국인 기술이사가 미국 에어터치사에 이런 내용의 장문보고서를 보냈다고 해요.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해법을 찿지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기술심의관실은 신세기통신측의 주장을 취합해 당시 CDMA상용화시험을 하던 서울 삼성동의 4개 기지국을 돌며 시험을 했다. 신세기통신은 핸드오프(hand off)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김 심의관과 신용섭 연구개발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방통융합실장) 등은 밤11시부터 새벽4시까지 직접 차량을 타고 시험한 결과 문제는 있지만 3개월가량 주야로 노력하면 99%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김 기술심의관은 1979년 12월 사무관시절 서울 영동과 당산전화국에 국내 처음으로 벨기에 BTM사가 턴키방식을 설치한 전자교환기(M10CN)의 공사를 관리한 경험이 있었다.
기술심의관실은 이를 토대로 경우의 수를 검토한 결과 PCS방식을 단일표준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정홍식 실장과 이계철 차관, 경상현 장관 등에게 단일표준으로 가야한다고 건의했다. 그리고 이런 방침을 결재까지 받았다. 김 심의관은 가장 현안이었던 한국통신의 CDMA방식 전환방침도 이끌어냈다.
당시 기술심의관실이 단일표준 결론을 내린 실증적 근거는 또 있다.
TDX국산화 시절의 사례다. 당시 TDX는 외국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면 부품가격과 운송비, 개발비, 일반관리비 등에 17%를 더 주었다. 반면 국산 개발은 그렇게 하지 않앗다. 그 결과 국내업체들은 외국부품을 수입해 조립생산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국산개발은 기피했다.
정부가 CDMA와 TDMA를 복수표준으로 결정한다면 결론을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모든 기업들이 손쉽고 이윤이 많은 외산을 수입해 조립생산을 하지 어려운 CDMA개발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책사업으로 1천억여원을 들여 세계 최초 상용화를 노리던 CDMA는 사장되고 말 것이 틀림 없었다.
정보통신부는 이런 전반적인 사항을 국익차원에서 검토해 PCS방식을 CDMA단일 표준으로 확정 발표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정부는 93년 6월 윤동윤 체신부장관이 CDMA를 디지털이동전화 기술표준으로 화정한 바 있다. 윤 장관은 재임시 CDMA개발에 장관직을 걸 정도로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었다.
이와 관련한 윤장관의 기억.
“우리가 TDMA방식을 도입하면 우리는 기술종속국으로 전락한다고 판단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CDMA기술을 개발한다면 우리가 기술종국국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결재서류에 디지털이동전화 기술표준은 CDMA로 한다는 내용이 빠져 있기에 그 내용을 다시 넣도록 해 결재를 했습니다”
이 결정이 뒷날 미국의 신세기통신의 TDMA방식 요구의 방패막이가 될 줄은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허가 조건과 다른 방식으로 서비스를 하면 사업권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표준방식은 국회 통신과기위원회(위원장 장경우)의 국정감사 등에서도 끊임없이 쟁점이 됐다. 독자기술이란 열매를 얻으려면 국가적 이익과 명분, 그리고 정책입안자와 연구진들의 확고한 개발의지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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