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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40>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0. 9. 2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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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개술 개발부터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실무는 신용섭 연구개발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방통융합실장)이 담당했다.


그는 93년 11월 기술기준과장으로 발령난 후 6년간 이 업무만 맡았다.

그의 회고.

“이 업무를 맡은 후 직책은 바뀌었지만 업무는 그대로 담당했습니다. 6년 후인 1999년 정보보호과장으로 발령이 나서야  CDMA에서 손을 땔 수 있었습니다. 저처럼 한 업무만 6년 간 담당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CDMA와 관련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언론에 이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국회,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등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너무 보고서를 많이 제출해 언제 무슨 보고서를 냈는지를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수도 없이 작성했으니 어떤 보고서를 언제 어디에 제출했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가 기억하는 보고서가 딱 하나 있다.

“대통령에게 CDMA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CDMA와 TDMA에 관해 보고하라는 청와대 지시에 따라  8절지 한 장에 핵심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당시 체성회에 사람을 대기시켜 놓은 후 보고서를 밤새 활판 인쇄를 해 이튼날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95년 하반기 정통부를 겨냥한 언론의 화살을 더 이상 견딜수 없었다.

 

고민 끝에 동아전기 이건수 사장(.사진. 현 동아일렉트론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 귀국해 86년 부도직전의 동아전기를 인수, 첨단기업으로 변모시켰다. 한인사회에서 그는 입지적적인 인물로 통했다.
귀국 후 그는 특유의 열정과 친화력으로 각계각층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 정,관, 언론계 등 그의 인맥이 없는 곳이 없었다.


신 과장의 회고.

“이건수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모든 언론들이 업계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니 논란만 치열해 졌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 사장은 두 말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저녁.

이 사장은 국내 유력 일간 신문과 3대 방송사 정치부장을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이얏트 호텔 일식당으로 초대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언합통신(현 연합뉴스), KBS, MBC, SBS 등이 참석했다. 이 사장은 안기부 오정소 1차장(국가보훈처장 역임)도 초청했다.



이 사장의 증언.

“이들과는 평소 인연을 맺어 잘 알고 지냈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박항구 이동통신개발단장(현 소암시스템 회장)에게 부탁해 A4용지 3장에 CDMA에 관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이를 이들에게 나눠 주고 국가이익을 위해 CDMA개발은 꼭 성공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CDMA기술을 상용화하면 세계 최초다’ 이런 기술을 정부가 개발하도록 언론이 도와줘야지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느냐고 설득했어요. 개별 기업보다는 국가를 위해 국산기술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부품과 단말기 등 연관산업도 발전할수 있잖아요.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가 기술개발을 해야 살길이 열린다며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



그 이후 국내 언론들이 이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정통부를 향한 언론의 화살을 이 사장이 나서 막아준 준 것이다.


이 사장은 CDMA상용화 이후 중국과 베트남의 제품 수출에도 민간외교관으로서 막후 역할을 했다 .

그는 CDMA 중국진출을 위해 8년간 중국 최고위층 인사들과 교분을 쌓은 후 이를 바탕으로 CDMA를 중국에 수출했고 이어 베트남에도 수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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