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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길상암

암자일기

by 문성 2010. 10. 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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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흔적. 
흔적없는 그림움이다.

티끌만한 흔적도 없건만 그것은 지울수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가을이 내 앞으로 다가오면서 추억이 그곳을 향해 내 마음을 잡아 당긴다. 그것은 해인사 길상암(사진)에 대한 그리움이다.흔적없는 그리움이다.



 세월은 스치는 바람처럼 무심하게 흘러 가지만 추억은 그시절, 그자리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그 추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한에 젖게 한다. 마치 이산가족의 한 처럼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기에 더 슬프다.

  그 시절 그 순간을 더 아름답게 알차게 보낼 걸 그렇게 히지 못한 후회의 뭉게 구름처럼 커진다.
지난 시절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생각할 수록 그립다. 천번 만번 되새김해도 싫증나지 않는다. 오히려 생생해진다.

  해인사 길상암.

내 그리움이 살아 숨쉬는 영혼의 휴식처요 안식처다. 나는 열 두 해전 그곳에서 속세에서 지치고 멍든 내 영혼과 육신을 재 충전했다. 여름 내내 그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살았다. 명진 스님의 배려와 보살핌아래서 무심의 상태로 지냈다.
해인사에는 14개의 부속암자가 있다. 해인사에 속한 암자들이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던 성철스님이 주석하시던 백련암. 혜암스님이 계시던 원당암. 일타 스님이 거처하시던 홍제암 등은 모두 산내 암자들이다.

  길상암도 그중의 하나다. 해인사 입구를 지나 약 1.5키로미터를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처음 만나는 암자다. 암자 임구에 ‘적멸보궁’이란 글을 새긴 입석이 있다. 그 옆에 근래 나무아미타불이란 글을 새긴 입석이 서 있다.

  적멸보궁이란 불가의 성지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적멸이란 모든 번뇌가 사리져 버린 고요한 상태, 즉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보궁이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적멸보궁으로는 다섯 곳이 있다. 흔히 5대 적멸보궁이라고 부른다. 불보사찰인 양산 통도사와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셨다는 오대산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등이다.

  길상암에는 모두 36과의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 길상암 뒤에 우람하게 치솟은 묘길상봉에 2과, 그리고 길상암 아래 홍류동 계곡 옆에 34과를 모셔 모두 36과의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한 곳에 이처럼 많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아직까지는 길상암 밖에 없다. 명진 스님이 24년간 기도끝에 모신 사리다. 

  진신사리를 모신 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불상 자리에 작은 방석만 놓여 있다. 불상보다 더 귀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까닭이다.

  길상암은 아래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숲에 가려 있다. 하지만 계단을 걸어오라가면 길상암은 큰 바위위에 좌선하듯 앉아 있다. 이곳은 기가 세다고 한다. 기가 약한 사람은 이곳에서 살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밤에 무서워 화장실에도 못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밤중에 신발끄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도 있다. 나는 명진스님이 열반 한 후 2층 요사채에서 혼자 자다가 밤중에 신발 끄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도량신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초 열반하신 법정스님의 법문을 듣고 무릎을 쳤다. 법정스님은 자신도 경험을 통해 ‘도량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이 곳은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내가 이곳에 머물던 12년전 당시 명진 스님이 주석하고 계실 때는 하루종일 염불소리와 기도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한 철 여름을 명진스님 그늘 아래서 보낸 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길상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럴 때 마다 명진 스님은 나를 반겨 주셨다.  언젠가 한 밤중에 길상암에 도착했더니 9시면 소등하는 길상암에  온통 불을 켜 놓았다. 감사하고 죄송했다.  

 명진스님이 열반에 드신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상좌 스님이었다.  스님의 수첩에 내 연락처가 적혀 있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새벽 안개속을 달려 길상암에 도착했다. 언제나 미소로 반겨주던 스님은 노란 국화꽃에 쌓여 눈길만 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나는 고이 잠듯 스님을 친견하고 곧장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더 머물기가 싫었다. 가슴이 아파서였다. 

지금은 그 상좌인 광해 스님이 주지소임을 맡았다.  
그가 주지로 부임한 뒤 길상암은 크게 변했다. 주변을 정비하고 명진 스님의 사리탑을 조성했으며, 대웅전 아래 지장전을 새로 마련했다.

  길상암 오르는 길은 거의 45도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다. 더운 여름에 계단을 올라가면 숨이 턱에 닿아 쓰러질 지경이다. 길상암에 도착하면 신도를 반기는 현판이 있다.

  “석가세존 진신사리 봉안도량”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도량이라는 의미다.

  그위에 가로로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지공승점지(指公僧點地)”

  지공 스님은 인도에서 온 고승이다. 그의 제자가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고 나옹선사의 제자가 조선조 한양터를 잡은 무학대사다. 속세의 촌수로 따지면 지공스님은 무학대사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10월 중순이면 명진스님의 열반 12주기를 맞는다. 세월의 빠름을 거듭 실감한다. 10여 년간은 매년 추모제에 참석했으나 근래 2년간은 참석하지 못했다. 세속의 일에서 마음을 내지 못한 탓이다. 올해도 참석하지 못한다.

  명진 스님의 기일 무렵이면 가야산이 오색으로 무르익었다. 청정함과 순진무구가  살아 있는 가야산 가을 모습은 아름답다.  계절은 다시와도 한 번 떠난 인연은 그만이다.  미움과 더러움, 속세의 분별심을 내려 놓고 사는 곳, 바로 해인사 길상암이다.

내 마음 머무는 곳, 외로울 때나 슬플 때 홀로 머무는 곳. 길상암이 나에게는 그런 곳이다.
오색 단풍이 가야산을 물들이면 내 가슴에는 가랑비처럼 그리움과 회한으로 젖는다.
저려오는 내 가슴속 아픔처럼 저 단풍도 속앓이를 해 노랗게 멍이 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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