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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일기-유점사

암자일기

by 문성 2010. 10. 2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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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점사는 금강산의 첫 사찰이다.

기록을 봐도 중국 백마사보다 63년이나 창건이 빠르다.



유점사(사진)는 신라 남해왕 원년, 즉 서기 4년에 유점사가 창건했는데 53불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온다.

유점사란 '느릅나무에 걸리다'라는 의미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직접 부처님을 뵐 수 있었다. 하지만 열반에 드신 후에는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문수보살이 법문을 하러 다니면 ‘부처님이 어떻게 생긴 분이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말로 설명했다.

“부처님의 코는 오뚝하고 눈을 호수 같고, 눈썹은 버들잎 같고, 입술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하자니 힘이 들었다.


생각 끝에 부처님 모습을 순금으로 조성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부처님 모습을 묻는 이가 없었다. 지금도 태국에는 5톤짜리 순금 불상이 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불상만 봐도 ‘부처님이 저런 모습이셨구나’하며 신심을 냈다.


문수보살은 이어 부처님 모습과 가장 닮은 53존의 불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철로 큰 법종을 만들었다.
문수보살은 이 법종속에 삼천불조 53존의 불상을 넣어 봉안한 뒤 동쪽을 향해 띄워 보냈다. 문수보살은 발원했다.

"53존불이시여. 바라옵건대 인연있는 나라에 가서 불법을 널리 펴시옵소서“


불상은 실은 범종은 파도 위를 달려 월지국, 지금의 태국에 이르렀다. 당시 월지국왕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다가 피곤해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앞 바다에 나가보라’고 말했다. 왕은 꿈이 하도 선명하여 대신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갔더니 큰 범종이 떠내려와 있었다. 그 속에는 금으로 조성한 53존의 부처님이 들어 있었다.


월지국왕은 서둘러 절을 지어 불상과 종을 봉안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그 절에 불이 났다.

다시 절을 복원하려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 그 불상과 종은 인연이 다른 곳에 있으니 부처님을 모시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왕은 할 수 없이 범종안에 53존불을 넣어 다시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그렇게 몇 달이 걸려

범종과 불상은 지금의 강원도 간성지방에 해당하는 안창현에 닿았다.


그 고을의 관리인 노춘은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가 수평선 저 멀리 웬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 온다는 신고를 받아 바닷가로 나갔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 이상한 자국이 있습니다."

한 아전이 주위를 살피다 소리쳤다. 자국을 따라 금강산 쪽으로 30여리를 갔더니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니 느릅나무에 범종이 걸려 있었다.

"여기 웬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닙니다. "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자그만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에 황금으로 된 53존의 불상들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이 절은 범종이 느릅나무에 걸려 있었다 하여, 이름을 '유점사'라 지었다. 지금도 유점사에는 53존의 부처님이 월지국에 잠시 머물렀던 인연을 상기시키기 위해 만든 '월지왕자'라는 사당이 있다고 한다. 또 새 떼가 몰려와 바위를 쪼아 팠다는 '조탁정'이란 우물이 있다.


53존불은 '무량수경'에 나오는 53존으로 이른바 과거 불사상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의 구도적 스승이었던 53선지식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명진 스님도 53불을 길상암 아래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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