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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남긴 마지막 선물

여행. 맛집. 일상

by 문성 2011. 1. 1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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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이별만큼 슬픈게 있을까.

지난 주 장모님이 영하의 추위속에 자식들의 눈물 배웅을 받으며 먼 길을 외롭게 떠나셨다. 영원히 올 수 없는 길을. 빈손으로 떠나셨다. 오래 전 앞서 가신 장인어른을 만나러 가셨다. 두 분이 천상에서 눈물의 상봉을 하셨을 게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위도 살을 에이듯 매서웠다. 한많고 굴곡많았던 80생 속세의 인연을 무 자르듯 끊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분신인 자녀들을 남기고 영원히 깰 수 없은 긴 잠에 들자니 그 심정인들 오죽하실을까.  날씨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이별의 시간이었을 게다.

인천 부평의 승화원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장모님을 벽제의 한 납골당에 고이 모시고 돌아서면서 절로 가슴속에 높은 파도가 일었다. 남은 자들의 오열이 터졌다. 가슴속에 장대비가 내렸다.
사는 게 뭔가. 생사의 길이 이렇게  허무한데 왜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살아야 하는가. 언젠가 나도 가야할 길이었다. 덧없이 떠도는 구름같은 인생이었다. 운다고 가신 장모님이 그 소리를 들으실까.

젊어 장인을 앞서 떠나 보낸 장모님은 6남매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여기에 큰 딸인 아내의 보탬도 없지 않았다. 동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내는 결혼 후에도 자식보다 형제를 더 끔찍히 생각했다.
넉넉지 못한 월급쟁이 사위인 나도 장모님과 두 번이나 한 집에서 살았다. 

처가는 멀수록 좋다지만 일찍 부모님을 잃은 나로서는 오히려 행복한 시절이었다. 월급날 빵보리따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게 나한테는 큰 즐거움이었다. 그 빵을 가족들이 모여앉아 나눠먹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회한이 눈물짓게 한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이 장성하면서 각자 살림을 차려 나갔다. 손자 손녀도 태어났지만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이 없는 법이었다. 장모님에겐 즐거운 날보다 속상하고 바람부는 날이 더 많았다. 장모님은  큰손자를 군대보내고 나서 오랫동안 손자에 대한 그림움으로 속앓이를 하셨다.   

노년에는 예고없이 찾아온 고약한 병마로 뇌와 관절수술을 받으셨다. 조금 편히 지내실만하니 불청객이 찾아든 것이다.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운 말년이었다. TV가 장모님의 유일한 낙이었다. 텅빈 집안에서 TV는 장모님의 유일한 벗이기도 했다.

지난해는 담도암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정작 당신은 담도암이란 사실을 임종 며칠전까지 몰랐다. 자녀들이 충격을 받으실까 알리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1년 정도는 더 사실것으로 말했다. 하지만 의사들의 말도 믿을 게 못됐다.

퇴원 후 요양병원에서 머물다가 다시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집근처에 있는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에 입원했다. 건강을 회복해 집으로 가길 원했으나 한번 나온 집은 다시 가지 못하게 병마가 가로 막았다. 요양원에서 집에 가길 그토록 갈망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집에 모셔가 볼 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합병증이 발생해 돌아가시기 10여일 전부터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하루가 다르가 상태가 악화됐다. 나중에는 고통으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진통제도 나중에 듣지 않았다. 막내처제가 암이란 사실을 말씀 드렸더니 이후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생명줄을 놓은 탓이라고 주위에서 말했다. 자식들의 마음도 고통이었다. 간병인을 두었지만 막내 처제가 장모님 수발을 도맡아 들었다. 장모님은 혈육이 옆에 없으면 불안해 하셨다. 불침번을 서듯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켰다.

언제나 넉넉하고 자애롭던 장모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고통에 찌든 모습으로 변했다.  겨울 나무처럼 앙상하게 마른 장모님의 육신을 보는 가족의 심정은 비통했다. 의료진도 해줄 게 없다고 했다.
마지막 임종은 큰처남과 막내 처제가 지켜봤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긴 잠에 드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임종일 아침 출근전 병실에서 마지막 본 장모님은 의식이 전혀 없이 그냥 힘겹게 숨만 쉬고 계셨다. 임종소식을 퇴근길에 들었다.
둘째가 전화를 했다. "외할머님 조금 전 돌아가셨어요"

병원에 달려 갔더니 장모님의 육신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치 주무시는 듯 했다. 숨만 멈췄을 뿐 생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통이 멈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얼굴이며 손이며 발이 따스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기는 사라지고 냉기가 흘렀다.  
 

장모님의 영혼은 인천 용화선원으로 모셨다. 그곳에서 불교식으로 49제를 모시기로 했다. 법당에 장모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이틀 후 삼우재를 지냈다. 스님들의 독경에 이어 자녀들이 차례대로 장모님의 영정앞에 잔을 올렸다.
나도 손아래 동서와 같이 잔을 드렸다. 

영정속의 장모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생시같으면 미소를 띠며 "어서 오게"하며 반겨 주셨건만 이제는 슬픈 눈길로 그윽히 쳐다만 보고 계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속세의 모든 인연 잊고 극락왕생하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장모님은 나한테 귀한 선물을 주고 가셨다. 우선 아내다. 내 삶의 동반자를 가난하고 일찍 부모를 잃은데다 형제조차 많은 집안의 맏며느리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셨다. 고생길이 휜한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두 아들을 두었다. 장모님은 친손자처럼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인가. 둘째 놈은 군에 가서 집에는 전화를 하지 않아도 외로운 외할머니한테는 수시로 안부전화를 했다. 그게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장모님은 두 아이한테 늘 말씀하셨다. "효자야 효자. 네 아빠, 엄마한테도 잘해라." 정이 담긴 그말씀도 이제는 두번 듣을 수 없다.
 
어느듯 노년에 든 아내를 장모님 몫까지 받아 더 잘 돌보고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나한테 있다. 더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도록 해야 한다. 실상 아내한테는 늘 미안하다. 아내가 걸머진 삶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 짐을 내가 내려 놓게 해야 하는데 아직은 역량부족이다. 내 탓이다.

장모님은 인연의 소중함과 존재의 고귀함을 깨닫게 해 주셨다. 
떠나면 그만이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또 형상(形象)이 있는 것은 절대라는 것이 없다. 
 
인생은 마치 지는 꽃과 같다. 장모님과 사위라는 고귀한 인연도 장모님이 속세의 그림자를 지우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남은 것은 추억뿐이다.
장모님은 스님들의 법문과 염불을 들으면서 해탈해 극락왕생하실까. 이제는 육신의 고통도 번뇌도 흐르는 세월속에 묻었을까.

나도  주위 사람들과 이별하는 일만 남았다. 저녁 노을처럼 지는 인연이  슬프다. 
꺼이 꺼이 소리치며 울고 싶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자필멸이다. 남은 인생, 베풀며 살자. 넉넉한 마음으로 봄햇살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좋은 인연처럼 행복한 삶은 없다.  그래도 이별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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